우열을 따지기는 뭣하지만
한번 생각해보자.
유럽 챔피언스리그 4강 진출과
메이저리그 1승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의미있는 성과일까.
저녁 즈음, 길거리 가판대에
스포츠신문들(15일자 초판)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놀랍게도,
단 한 개의 스포츠지도 어김이 없다.
모두가 헤드라인에 박찬호의 시즌 첫 승을 내걸었더라.
관중이 기립박수를 보냈다나.
박찬호가 한국 최고의 스포츠스타인 것은 인정하지만
그 스타가 고작 시즌 1승 거둔 것이 그리 큰 뉴스인지
나는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1달에도 여러번 거둘 수 있는 메이저리그 1승이
1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챔피언스리그 4강의 무게보다
더 무겁다는 게 잘 납득이 가질 않는거다.
유럽 챔피언스리그 4강.
적어도 유럽 안에서는 엄청난 성과다.
유럽은 물론이고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에서도 주목하는 이벤트다.
more..
메이저리그?
박찬호의 1승을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명문이라고 할 수 없는 팀들 간의 경기에서
객관적으로 봤을 때
평범한 투구로 1승을 거둔 그에게 관심을 쏟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미국스포츠지만, 미국인들조차 크게 관심갖지 않는
성과라는 얘기다.
한국 언론이 그리 대단하게 추앙하는 메이저리그라는게 그렇다.
20승에 도전하던 전성기 시절에도,
박찬호의 이름을 기억하는 미국인의 수는 제한적이었다.
그 밖의 나라 사람들이야 말해 뭣하랴.
축구는 어떤가. 은퇴한지 15년이 넘었지만
유럽에서의 차붐은 미국에서의 박찬호에 비해 훨씬 유명하다.
야구는 '국지적'인 스포츠지만,
축구는 '전지구적'인 스포츠다.
야구기자는 기껏해야 일본과 미국밖에 못가지만
축구기자는 전 세계를 누빌 수 있다.
즉, 매체의 뉴스가치 판단의 기준이
한국의 위상을 '얼마나' 많이 떨쳤느냐가 된다면
(어차피 외국팀에서 뛰는 한국 선수의 경기인 이상)
유럽클럽축구에서의 성과가 메이저리그의 성과에 뒤쳐질 이유
하나 없단 얘기다. 인구 숫자만 따져도 그렇지 않나.
게다가, 앞에 언급했듯이 박찬호의 승리는
미국 지방지 몇군데에서나 톱으로 취급될지 몰라도
이영표와 박지성의 4강 진출은 네덜란드 뿐만이 아니라
전 유럽의 스포츠 미디어가 주요 뉴스로 처리한다.
자, 좀 더 살펴보자.
PSV아인트호벤과 리옹의 8강 1차전의 경우,
네덜란드와 프랑스의 공중파 시청율이 나란히 30%대를 넘었다.
상상이 되는가. 시청률 30%라면 그 나라 사람 태반이 그 경기를
본다는 얘기며 이영표-박지성의 얼굴쯤은 자연히 익숙해진다는
뜻이다. 시청률 30% 드라마에 등장하는 조연급 배우들의 얼굴마저
너무 쉽게 기억하는 우리를 떠올려보자.
게다가, 소속리그팀 경기가 아닌지라 케이블TV 위주로 중계된
이탈리아와 스페인, 잉글랜드 등지에서도
도합 500만에 이르는 시청자가 그 경기를 관전했다.
(TV시청률 자료 : Football Insider 참조)
더군다나,
PSV의 승리로 끝난 리옹과의 8강 2차전이 끝난 직후
네덜란드, 아니 유럽의 축구영웅인 요한 크루이프는
공중파 TV중계가 끝나고 이어진 스튜디오 프로그램(Studio Sport)에 출연해
박지성을 따로 언급하며 극찬했다 한다.
네덜란드 친구의 전언에 따르면 크루이프(본토 발음은 '크라이프'에 가깝다고 하지만)는
"박지성의 전술적 움직임은 대단히 뛰어나다.
120분 내내 그라운드를 쏘다니는 엄청난 체력도 놀랍다"고
찬사를 보냈단다.
참고로 이 프로그램의 시청자수는 평균 350만명이다.
난 아직, 미국 야구계에서 크루이프급에 해당하는
(그런 인물이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인사가
(한국 언론을 상대로 한 립서비스가 아닌) 본토인들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에서
박찬호의 기량을 극찬한 것을 본 일이 없다.
거듭 말하지만, 박찬호의 성과와 기량을 폄하하려는 게 아니다.
박찬호가 미국 스포츠에서 거둔 성과 못지 않게 (혹은 이상으로)
이영표-박지성이 거둔 국제적 성과의 크기가
어쩌면 더 큰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닐까라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논점은
한국 사회가 그만큼 미국 문화에 강력히 종속되어 있다는 것과 연관되어 있는게 아닐까.
미국이 가진 힘, 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스포츠 뉴스의 가치 판단에도 크게 힘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분야에서처럼.
그게 아니라면,
박찬호의 시즌 1승이 박지성-이영표의 챔피언스리그 4강 진출보다
작게 다뤄지는 일을 납득할 수 없다.
물론,
그 인과관계가 어떻든 한국에서 야구가, 그리고 박찬호가
그만한 인기를 가지고 있다는 게 기사 배치의 주된 근거였다라면
조금이라도 더 수긍할 수 있었을 지 모르겠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몇몇 중앙일간지들,
수퍼볼 시즌이 되면 미식축구 기사를 상당히 크게 다룬다.
스포츠 섹션 1면을 도배하는 것도 여러해 동안 보아왔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미식축구는 그만한 인기를 누리는 스포츠인가.
한국인들의 관심사가 (누가 봐도) 적은 이 스포츠가
미국에서 큰 관심을 끈다는 이유로,
또는 외신을 통해 많은 기사가 들어온다는 이유로,
빠짐없이 국내 언론을 통해 소개되는 현실은 그러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나.
그러니까 내 말은,
국제적 관심도를 따져 뉴스가치를 평가한다면
이영표-박지성의 4강 진출이
(별다른 기록이나 눈물겨운 인간드라마가 결부되지 않은) 박찬호의 1승보다 절하될 이유
없지 않냐는 얘기이고,
자국내 인기, 혹은 국민적 관심사를 따져 뉴스가치를 평가한
것이라면 그 잣대가 왜 꼭 (대표팀을 제외한) 축구 분야에
이르러 고무줄처럼 변하느냐는거다.
정말이지 알 수 없다.
또 덧붙이자면,
개인적으로 정말 알 수 없는 게,
아직도 정말 박찬호의 1승에 관심갖는 사람의 수가
이영표-박지성의 챔피언스리그 4강에 관심갖는 사람의 수보다
그렇게나 더 적을까. 라는거다.
한국에서의 축구는
아직도 정말 그것밖에 안되는걸까?
혹시라도,
스포츠지들이 독자들의 관심 분야를 잘못 짚은 건 아닐까.
그간 매체들이 메이저리그에 쏟아부은 열성적인 성원 덕분에
메이저리그의 인기가 대단히 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어떻게 스포츠지 네 개가 똑같이,
이영표-박지성의 4강 진출을 제쳐두고
박찬호의 1승을 앞머리에 올릴 수 있는건지
솔직히 나로선 이해가 되질 않는다.
단지 내가 축구를 조금 더 좋아하기 때문에 그러는건가?
다른 사람들이 볼땐
여전히 박찬호의 시즌 첫 승. 그것도 완봉도 아니고
완투도 아닌 승리가
우리 선수들의 유럽 챔피언스리그 4강 진출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감동적인 것일까.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이건 좀 불공평하다.
메이저리그에서의 성취가 더 높이 평가받는 것은
전적으로 그간 메이저리그에 퍼부은 각종 매체의 물량공세 덕이니까.
그렇게 추켜세워진 메이저리그의 위상이 챔피언스리그보다
더 대단하게 여겨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니까.
그러니, 가판대를 훑어보며 느낀 불쾌함은
좀체 줄어들 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저 내 가치판단에 문제가 있다거나
시야가 좁아지고만 것을
자책하고 말아야하나. 모르겠네. 참.
어쨌든 씁쓸한 마음은 쉽게 지워내질 못하겠다.
어째 이러할까. 정말 모르겠다.
도대체 이 땅에서 축구는 왜 이렇게 천덕꾸러기인거냐.
대표팀 경기만 빨아먹히고 내팽겨쳐진 껍데기. 댄장할.
+) TV 뉴스에서 챔피언스리그 4강 진출이 좀 더 크게 다뤄진 것은 논외다.
이건 뉴스가치 판단과 별개인 요소가 더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4강 진출이 더 중요해서라기보다는 메이저리그 중계권이 제3의 채널로 넘어가면서
국내 방송 3사가 메이저리그 화면을 사용하기 어렵게 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하니.
[서프라이즈 노짱토론방 펌]